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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아버지께 성폭행당한 자에 대한 법륜 스님의 상담을 보고...

by 홈지기 posted Feb 1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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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아버지께 성폭행당한 자에 대한 법륜 스님의 상담을 보고 저라면 어떻게 상담했을까 고민하면서 적어봅니다.

예수님의 상담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이는 또 교회관과도 연결되는데요. 글이 좀 길어졌지만 한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 묻는다 & 듣는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전지전능이 있으신 분입니다.
하지만 먼저 너는 이렇지?라고 점쟁이 처럼 말씀하지 않습니다.
먼저 물어 보시죠. 날 때부터 봉사인 사람,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십니다. 요즘 마치 점쟁이처럼 내가 성령이 충만하니 다 통달한 것 처럼 말만 앞서는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르죠.

물으신다는 것은 "존중"을 의미합니다.
인격의 존중, 영적존중이지요. 기독교가 신본주의이기는 하지만 그 신은 우리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를 신의 인격으로 존중하는 "사랑"이기에 인간의 인본주의보다 더 귀한 것이 됩니다.

물으시는 주님은 당연히 들으시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들어야 합니다.

제가 상담을 할 때도 처음에는 듣는데 많은 시간을 소요합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들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2. 공감과 위로입니다.

소위 영적 지도력을 가진 사람들은 말하는데 익숙하지 듣는데는 서투릅니다.
하지만 정작 가장 큰 위로는 들어주는 것과 들어주는 행위과 태도를 통해서 동의하고 공감하는 정서적 교감입니다.

묻는 것과 들어주는 거의 가장 큰 유익은 바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죠.
법륜 스님의 상담이 이질감이 드는 것은 피상담자의 아픔과 필요에 대한 공감이 없이, 자신의 관념적 이상에 머무른 상담에 그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중에게도 공감받지 못하는 것이죠.

만을 위의 사례처럼 아버지께 성폭행을 당한 자가 상담을 했다면, 그의 아픔과 상실감을 먼저 공감하고 그 공감대 위에서 위로의 시간이 충분히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3. 공감과 위로뒤의 동행이 빠지면 안됩니다.

상담을 통해 상처와 아픔을 알았다면, 공감하고 위로하는 것은 개인적 대처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만 그친다면 큰 문제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 말씀에 율법학자가 "누가 나의 이웃이냐"고 묻습니다.
종교적 관념에 빠진 자들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알지만 정작 누가 이웃인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웃의 개념을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될까요?
강도만난 자에게 이웃은 "그를 직접적으로 돕는 자"였던 것입니다.

먼저 이웃이 되기 위해서는 도와야 합니다.
나의 필요보다 타인의 필요를 바라보는 자가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강도만난 자는 자신의 생명을 도와준 "사마리아인"을 진정한 이웃으로 여기게 되었을 것이고, 예수님 말씀처럼 그 이웃(사마리아인)을 자시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 혹은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런 이웃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돕는 자를 만나면, 그의 진심과 사랑을 느꼈다면 그를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위기에서 함께 동행하며 나를 도와줄 진정한 이웃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혹은 그 이웃이 되는 방법, 그 이웃을 정의하는 방법조차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상담은 어쩌면 이런 "강도만난 자"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피흘리면 죽어가는 영혼에게 괜찮을 거야,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셔라는 위로만으로는 살릴 수 없습니다.

배고픈 자에게 "굶지마, 굶으면 배고프자나"라고 위로하는 것은 도움이 안됩니다.
그걸 몰라서가 아니라, 먹을 것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영의 말씀을 주셨고, 이후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육의 양식을 주셨습니다.

이는 영과 육, 말씀과 실천의 규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가 외적 성정에 기대어 있을 때, 관념적, 종교적 이슈에만 집중하고 있을 때, 주님은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의 울부짖음에 귀기울이고 계실 것입니다.

위로가 있는 동행, 이웃이 되는 동행이 한국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격리와 재발방지를 위한 각고의 노력에 교회가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4. 문제해결

인간본질에 해당되는 상처, 자신의 잘못이 아닌 타인의 죄로 인한 피해받은 상처에 대해서 "종교적 용서" 외에는 답하지 못하는 관념적 종교성이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식상한 종교적 대안, 즉 용서와 사랑이라는 뻔한 대답도 실은 성경적 대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죄를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밝히고 죄인의 삶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아버지가 그런 파렴치한 죄를 저질렀다면 실질적인 방법으로 재발되지 않도록 피해자를 도와 가해자에 적절한 대처를 해야만 합니다.

5. 죄와 고통의 구분

자신의 죄인가, 타인의 죄인가?
자신의 죄로 인한 고통인가, 타인과 환경에 의한 고통인가?

우리는 죄와 고통을 세분화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죄와 잘못으로 인한 것은 회개해야하죠.
그런데 정작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회개를 외치는 자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눈물흘리고 아파하면서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한 고통은 오히려 하나님의 회개에 이르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문제는 타인의 죄로 인한 고통까지 그 개인에게 책임지우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공동체 개념이 적용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신앙 공동체의 역할이 중요하게 됩니다. 현재는 거의 상실된 개념이기에 익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즉 어떤 이는 잘못하고 죄 가운데 있을 때, 교회 공동체의 한 두명이 권면하고, 이후에 두 세사람이 권면하고, 최종적으로 교회회중들이 권면하여도 듣지 않을 때 그를 교회 공동체에서 추방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대처없이 인본주의적 사랑, 알미니안적 구원관, 세속주의와 다원주의에 물들어가는 교회로서는 이런 말씀에 기초한 정화작업을 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죠.

결론,

교회은 영적 허들링 공동체입니다.
그 누구도 혼자서는 이 혹독한 영적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깨어있는 신앙이 서로가 선한 이웃이 되어, 사랑하되 자신의 몸과같이 사랑할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유일한 성경적 교회입니다.
상담은 그 과정을 통해 "강도만난 자"를 살리고 그 선한 이웃으로 함께 이우어가는 과정이 되어야 하구요.

명절 잘 보내시고, 선한 이웃을 많이 만나 사랑의 허들링으로 세워 나가시길 축원합니다.

힐링교회 김형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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