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전 3:12, 개정)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세상을 벗어나 독신으로 교회를 이루어가시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분의 삶을 존경하고, 성직자로서 영적인 것이 더 충만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도 속세를 벗어나 구도의 삶을 사는 종교인들을 보면서 더 많은 존경심을 갖고, 복음안에 있는 사람들도 이런 것은 비슷합니다.
자신들이 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존경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의 생각은 다릅니다.
정말 존경스러우신 분들은 세상을 벗어나 홀가분하게 사는 분들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벗어나고 싶고, 압박하는 삶의 굴레에서도 자신의 위치와 사명을 감당하는 여러분들이십니다.
때로는 가족이, 때로는 신앙과 교회가 굴레가 되고, 그 굴레를 언제든지 벗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고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말없이 눈물을 흘리시는 여러분들의 믿음이 더 위대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을 위한 십자가를 지신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과 영원한 삶의 자격을 얻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십자가는 나의 십자가, 자신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나의 십자가는 예수님이 감당하셨고, 내가 지어야할 십자가는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붙들고 그 십자가의 사랑을 더 많이 흐르도록 함께 붙잡는 것입니다.
그것은 삶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속을 떠나서 홀가분하게 아무 미련없이 사는 것이 십자가의 삶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십자가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십자가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진정한 십자가를 감당하는 삶, 십자가를 통해서 삶의 무게를 이겨내는 삶, 온갖 굴레와 아픔을 감당하는 방법을 그들에게 찾을 수 있을까요?
자기도 살지 못한 삶을 아무리 떠들어도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가 될 것입니다.
오히려 온전한 십자가의 삶을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자기 십자가의 교리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그들의 화려한 언변은 귀를 즐겁게 해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삶의 문제에 직면에서는 그들의 조언과 언어는 무기력한 것임을 또 느끼게 될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회피하는 삶의 신앙과 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을 끝까지 자신의 내면의 죄와 사망의 굴레를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드러내어 보였습니다.
세상을 떠난 자가 아니라, 세상을 감당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대게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세상을 악하게 정죄합니다.
세상을 벗하지 말고, 세상을 의지하지 말라는 표현 속에 더욱 세상을 떠나 그들과 상관없이 지내는 자신들의 삶을 변호합니다.
지금 필요한 메시지와 신앙적 삶의 고백은 삶의 터전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의 변론적 설교나 종교적 멘토링이 아닙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의 삶처럼, 우리 신앙인의 삶도 우리가 거한 처소에서 더욱 십자가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영으로 사는 것이 육으로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증명해야 하는 삶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지탄받는 것은 영의 말씀과 육의 삶의 각각 다르기 때문이질 않습니까?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도 모두 익히 잘 아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구원받은 자의 삶이 어떠한 것인가를 세상에 드러내보여야 합니다.
거기서 쫒겨가거나 실패하여 도망가는 형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삶을 십자가로 짊어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현실의 무거운 짐 때문에 아파하거나, 어려운 분들일 수록 종교적 허무주의, 영지주의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 마약입니다.
현실은 썩어가도 마약에 취해서 살아가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러할 수록 하나님의 뜻과 의미를 분별하고 바로 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홀가분하게 자기 삶을 사는 자보다는, 믿음으로 이웃을 위한 십자가를 감당하는 삶을 더욱 기뻐하실 것입니다.
피차에 서로 사랑하는 십자가 지기를 꿈꾸는 힐링교회 김형석 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