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안내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Bible 고린도전서 16:1-2
우리은행 1005-702-107884 힐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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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교회 재정 운영원칙
0. 투명의 원칙 - 투명한 재정을 운영한다.
1. 감동의 원칙 - 성령의 감동에 의한 예물(헌금)을 드린다.
2. 필요의 원칙 - 성령의 필요를 위한 쓰임에 재정을 운영한다.
성도의 필요를 위한 쓰임에 재정을 운영한다.
3. 합의의 원칙 - 성도와 합의된 재정계획을 집행한다.
4. 공동체 원칙 - 운명공동체, 신앙공동체의 기준에 합당한 재정계획을 운영한다.
재정상황 및 계획
성도들이 시험에 들어 신앙을 떠나거나, 타종교로 개종할 때 헌금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못된 물질관과 헌금 강요로 성경적 가치관이 흔들리고 변질되는 상황이 많기 때문입니다.
힐링교회를 개척하면서 가장 민감한 부분 또한 헌금이 아닐까 합니다.
대형교회는 물질이 많아서 문제이고 개척교회는 물질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하지만, 현재 재정의 많고 적음을 떠나 헌금의 올바른 가치관과 기준을 가지고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홈페이지를 통해서 헌금에 관한 목회적 고민을 드러내 보이는 이유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 입니다.
지금 하지않으면 자칫 저 스스로도 넘기지 못할 유혹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아직, 교회는 재정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매 달 이런저런 모양으로 목회를 이루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항상 하나님이 누군가의 손길을 통해서 교회를 운영하고 계시는 것은 명확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재정적 자립이 이루어지는 시점에 재정을 공개하고 소통과 투명을 원칙으로 하는 재정운영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지금은 공개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재정이 어려운 교회에 혹시나 부담을 느끼는 성도들이 신앙성숙이라는 본질을 잊고 신앙생활이 흐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소망하는 그러한 날이 올 수 있도록 기도부탁 드리겠습니다.
헌금의 성경적 원칙
하나님은 헌금을 필요하실까요?
하나님은 물질이 필요해서 헌금을 강요하시는 분일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나 목회자들이 헌금을 강조하다보니
하나님을 헌금을 좋아하고 목적으로 여기는 신으로 오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물질을 뛰어넘으시는 분이요, 오히려 물질을 주관하시며 우리의 공급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헌금은 누구에게 드리는 것일까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신앙의 모든 대상이십니다.
헌금은 기도와 찬양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소통하는 성도의 아름다운 권리이자 방법입니다.
성도의 마음을 드리는 표현의 방식입니다.
이 때 사용하는 용어는 '헌금'보다는 '예물'이 더 적합합니다.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마태복음 26:7)
이 여인은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향유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그 여인의 마음이자 중심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우러러 나오는 예물을 드린 것입니다.
받는 자를 귀하게 여김으로 귀한 예물을 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하여 경홀히 여기는 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마음과 중심을 보시고 읽으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예물이든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드리시길 바랍니다.
사람을 의식하는 헌금, 체면 때문에, 혹은 억지로 하는 헌금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종교행위가 되어버립니다.
그럴바에야 차라리 몸에 좋은 건강음식을 사 드시는게 최소한 몸에는 좋은 효과가 나오지 않을까요?
힐링교회는 하나님을 귀하고 존귀하며 창조주 하나님으로 섬기는 성도들의 예물로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믿음의 권면을 드립니다.
헌금은 성도를 위한 가치를 지닙니다.
헌금의 쓰임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인간(=성도)이라는 의미입니다.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고린도전서 16:1-2)
성경은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연보, 즉 헌금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이 말씀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것을 "성도를 위한 필요"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보더 더 좋은 표현을 아직 찾지를 못하겠네요.
신약시대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들고 뿔뿔이 흩어진 사도들이 가정에서 들판에서 사람들이 사는 삶의 터전에서 '디아스포라'를 이루며 성도들의 마음에 성전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교의 전통적인 '성전헌금'은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성전은 건물 자체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비용이 소모되었기에 성전을 위한 헌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의 교회와 성전은 눈에 보이는 건물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곳은 '예배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전'은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에 모신 고백이 있는 '성도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그럼 건축헌금은 모두 비성경적인 것일까요?
이 또한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와 신앙공동체가 필요로하고, 신앙의 성장과 복음의 전파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이를 위한 헌금은 필요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인간적 필요,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가진 자들의 성장을 위한 재정적 안정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역을 통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헌금이 되어야 합니다.
건축헌금을 예로 들었지만 복음사역을 위한 많은 필요가 있을 수 있습니다.
먼저 그 필요가 정말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필요한 것인지를 분별하고, 그 필요가 합당하다면 성도는 온전히 힘을 모아 그 일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십일조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십일조는 무엇일까요?
앞서 헌금은 성도의 필요를 위한 쓰임이라고 했습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 입니다.
십일조도 성도를 위한 필요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에게 아브람의 고백의 표시로 드린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멜기세덱이 제사장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민수기에 이르러서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민수기 18:21)
십일조의 쓰임이 나옵니다.
바로 제사를 담당하는 제사장과 레위지파를 위한 "하나님의 공급"인 것입니다.
생업이 없이 구약의 제사, 오늘날의 목회를 담당하는 레위지파를 위해 남은 11개 지파가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 십일조의 쓰임입니다.
오늘날에는 십일조가 목회자의 생계를 유지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막대한 재정으로 불어나게 되었습니다.
대형교회 일수록 그렇습니다. 이는 십일조의 용도를 변경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대형화가 되면 안되는 이유중의 하나가 십일조라는 것을 이해하시겠나요?
십일조는 이스라엘 민족이 운명공동체, 신앙공동체로서 얼마나 하나님 중심으로 단결하였는지를 알려주는 잣대입니다.
하나님과 공동체에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십일조를 할 필요나 감동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건강한 작은 교회들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중심으로 믿음의 삶을 이루어가는 운명공동체가 되기위해서는 올바른 십일조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힐링교회는 교회를 많이 개척하는 교회가 되고자 합니다.
이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교회의 재정입니다.
개척을 하는 방법으로 사역자 1명, 10명의 십일조 교인의 비율이 이상적이라 생각하는데,
이런 이상적인 교회가 건강한 물질관과 복음의 열정으로 개척될 수 있도록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헌금은 어떤 액수를 해야할까요?
성경은 헌금의 액수를 규정하지 않습니다.
헌금의 액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머리에 비싼 향유옥합을 드린 여인은 그 드린 예물에 액수나 이름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한가지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감동"입니다.
십일조가 있지 않냐구요?
정작 예수님과 사도들은 십일조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십일조를 반대하시는 분들은 쾌거를 부르실 수 있습니다.
그동안 십일조가 잘못되었다고 교회를 공격할 수 있으니깐요.
하지만 까무라칠 말씀이 있습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사도행전 2:45)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행전 4:34)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사도행전 4:37)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사도행전 5:1)
보셨나요?
신약시대 초대교회의 "성령에 감동"되어 뜨겁게 달구어진 성도들은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십일조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전 재산을 팔아 헌금으로 드리는 것은 막지 않으셨습니다.
설마 예수님이 그러셨을라나? 의문점이 드시나요?
아닙니다. 정말 그러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태복음 19:21)
이렇게 되면 머리가 복잡해 지시죠?
십일조를 폐했더니 더 큰 액수가 눈에 보이니 말입니다.
왜, 예수님과 사도들은 이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구원의 기쁨,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헌금과 물질생활은 구원과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성령의 감동이 없으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드리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재산을 팔아 헌금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액수와 상관없이 성령의 감동으로 하라는 의미입니다.
액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감동에 민감한 영적 상태가 되시기 바랍니다.
헌금의 투명한 집행과 온전한 쓰임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요.
교회가 넘어지는 많은 경우가 물질 때문입니다.
사단은 물질을 통해서 시험을 줍니다.
교회와 목회자들, 그리고 감시와 감독을 게을리한 성도들이 함께 반성하고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힐링교회는 "회중정치"의 원리로 모든 재정문제를 해결해 나가길 원합니다.
성숙한 물질관과 감동이 있는 헌금생활이 본이 되는 교회가 되기기를 소망합다.
기도해주십시요.
힐링교회와 성도들이 건강한 신앙공동체, 운명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김형석 목사 드림.
0. 투명의 원칙 - 투명한 재정을 운영한다.
1. 감동의 원칙 - 성령의 감동에 의한 예물(헌금)을 드린다.
2. 필요의 원칙 - 성령의 필요를 위한 쓰임에 재정을 운영한다.
성도의 필요를 위한 쓰임에 재정을 운영한다.
3. 합의의 원칙 - 성도와 합의된 재정계획을 집행한다.
4. 공동체 원칙 - 운명공동체, 신앙공동체의 기준에 합당한 재정계획을 운영한다.
재정상황 및 계획
성도들이 시험에 들어 신앙을 떠나거나, 타종교로 개종할 때 헌금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못된 물질관과 헌금 강요로 성경적 가치관이 흔들리고 변질되는 상황이 많기 때문입니다.
힐링교회를 개척하면서 가장 민감한 부분 또한 헌금이 아닐까 합니다.
대형교회는 물질이 많아서 문제이고 개척교회는 물질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하지만, 현재 재정의 많고 적음을 떠나 헌금의 올바른 가치관과 기준을 가지고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홈페이지를 통해서 헌금에 관한 목회적 고민을 드러내 보이는 이유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 입니다.
지금 하지않으면 자칫 저 스스로도 넘기지 못할 유혹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아직, 교회는 재정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매 달 이런저런 모양으로 목회를 이루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항상 하나님이 누군가의 손길을 통해서 교회를 운영하고 계시는 것은 명확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재정적 자립이 이루어지는 시점에 재정을 공개하고 소통과 투명을 원칙으로 하는 재정운영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지금은 공개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재정이 어려운 교회에 혹시나 부담을 느끼는 성도들이 신앙성숙이라는 본질을 잊고 신앙생활이 흐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소망하는 그러한 날이 올 수 있도록 기도부탁 드리겠습니다.
헌금의 성경적 원칙
하나님은 헌금을 필요하실까요?
하나님은 물질이 필요해서 헌금을 강요하시는 분일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나 목회자들이 헌금을 강조하다보니
하나님을 헌금을 좋아하고 목적으로 여기는 신으로 오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물질을 뛰어넘으시는 분이요, 오히려 물질을 주관하시며 우리의 공급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원칙 1. 헌금의 대상
헌금은 누구에게 드리는 것일까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신앙의 모든 대상이십니다.
헌금은 기도와 찬양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소통하는 성도의 아름다운 권리이자 방법입니다.
성도의 마음을 드리는 표현의 방식입니다.
이 때 사용하는 용어는 '헌금'보다는 '예물'이 더 적합합니다.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마태복음 26:7)
이 여인은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향유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그 여인의 마음이자 중심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우러러 나오는 예물을 드린 것입니다.
받는 자를 귀하게 여김으로 귀한 예물을 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하여 경홀히 여기는 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마음과 중심을 보시고 읽으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예물이든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드리시길 바랍니다.
사람을 의식하는 헌금, 체면 때문에, 혹은 억지로 하는 헌금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종교행위가 되어버립니다.
그럴바에야 차라리 몸에 좋은 건강음식을 사 드시는게 최소한 몸에는 좋은 효과가 나오지 않을까요?
힐링교회는 하나님을 귀하고 존귀하며 창조주 하나님으로 섬기는 성도들의 예물로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믿음의 권면을 드립니다.
원칙 2. 성도의 필요를 위한 쓰임
헌금은 성도를 위한 가치를 지닙니다.
헌금의 쓰임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인간(=성도)이라는 의미입니다.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고린도전서 16:1-2)
성경은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연보, 즉 헌금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이 말씀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것을 "성도를 위한 필요"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보더 더 좋은 표현을 아직 찾지를 못하겠네요.
신약시대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들고 뿔뿔이 흩어진 사도들이 가정에서 들판에서 사람들이 사는 삶의 터전에서 '디아스포라'를 이루며 성도들의 마음에 성전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교의 전통적인 '성전헌금'은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성전은 건물 자체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비용이 소모되었기에 성전을 위한 헌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의 교회와 성전은 눈에 보이는 건물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곳은 '예배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전'은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에 모신 고백이 있는 '성도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그럼 건축헌금은 모두 비성경적인 것일까요?
이 또한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와 신앙공동체가 필요로하고, 신앙의 성장과 복음의 전파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이를 위한 헌금은 필요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인간적 필요,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가진 자들의 성장을 위한 재정적 안정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역을 통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헌금이 되어야 합니다.
건축헌금을 예로 들었지만 복음사역을 위한 많은 필요가 있을 수 있습니다.
먼저 그 필요가 정말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필요한 것인지를 분별하고, 그 필요가 합당하다면 성도는 온전히 힘을 모아 그 일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원칙 3. 십일조에 관하여
십일조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십일조는 무엇일까요?
앞서 헌금은 성도의 필요를 위한 쓰임이라고 했습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 입니다.
십일조도 성도를 위한 필요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에게 아브람의 고백의 표시로 드린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멜기세덱이 제사장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민수기에 이르러서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민수기 18:21)
십일조의 쓰임이 나옵니다.
바로 제사를 담당하는 제사장과 레위지파를 위한 "하나님의 공급"인 것입니다.
생업이 없이 구약의 제사, 오늘날의 목회를 담당하는 레위지파를 위해 남은 11개 지파가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 십일조의 쓰임입니다.
오늘날에는 십일조가 목회자의 생계를 유지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막대한 재정으로 불어나게 되었습니다.
대형교회 일수록 그렇습니다. 이는 십일조의 용도를 변경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대형화가 되면 안되는 이유중의 하나가 십일조라는 것을 이해하시겠나요?
십일조는 이스라엘 민족이 운명공동체, 신앙공동체로서 얼마나 하나님 중심으로 단결하였는지를 알려주는 잣대입니다.
하나님과 공동체에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십일조를 할 필요나 감동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건강한 작은 교회들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중심으로 믿음의 삶을 이루어가는 운명공동체가 되기위해서는 올바른 십일조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힐링교회는 교회를 많이 개척하는 교회가 되고자 합니다.
이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교회의 재정입니다.
개척을 하는 방법으로 사역자 1명, 10명의 십일조 교인의 비율이 이상적이라 생각하는데,
이런 이상적인 교회가 건강한 물질관과 복음의 열정으로 개척될 수 있도록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원칙 4. 헌금 액수에 관하여
헌금은 어떤 액수를 해야할까요?
성경은 헌금의 액수를 규정하지 않습니다.
헌금의 액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머리에 비싼 향유옥합을 드린 여인은 그 드린 예물에 액수나 이름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한가지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감동"입니다.
십일조가 있지 않냐구요?
정작 예수님과 사도들은 십일조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십일조를 반대하시는 분들은 쾌거를 부르실 수 있습니다.
그동안 십일조가 잘못되었다고 교회를 공격할 수 있으니깐요.
하지만 까무라칠 말씀이 있습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사도행전 2:45)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행전 4:34)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사도행전 4:37)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사도행전 5:1)
보셨나요?
신약시대 초대교회의 "성령에 감동"되어 뜨겁게 달구어진 성도들은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십일조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전 재산을 팔아 헌금으로 드리는 것은 막지 않으셨습니다.
설마 예수님이 그러셨을라나? 의문점이 드시나요?
아닙니다. 정말 그러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태복음 19:21)
이렇게 되면 머리가 복잡해 지시죠?
십일조를 폐했더니 더 큰 액수가 눈에 보이니 말입니다.
왜, 예수님과 사도들은 이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구원의 기쁨,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헌금과 물질생활은 구원과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성령의 감동이 없으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드리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재산을 팔아 헌금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액수와 상관없이 성령의 감동으로 하라는 의미입니다.
액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감동에 민감한 영적 상태가 되시기 바랍니다.
헌금의 투명한 집행과 온전한 쓰임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요.
교회가 넘어지는 많은 경우가 물질 때문입니다.
사단은 물질을 통해서 시험을 줍니다.
교회와 목회자들, 그리고 감시와 감독을 게을리한 성도들이 함께 반성하고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힐링교회는 "회중정치"의 원리로 모든 재정문제를 해결해 나가길 원합니다.
성숙한 물질관과 감동이 있는 헌금생활이 본이 되는 교회가 되기기를 소망합다.
기도해주십시요.
힐링교회와 성도들이 건강한 신앙공동체, 운명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김형석 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