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 명절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근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게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 (요한복음 7:10~13)
예수님이 은밀히 보시는 때가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시기임에도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시기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는 귀한 말씀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이 메시야인지 아닌지에 대한 수근거림으로 시끄럽습니다.
예수님의 수많은 이적을 보면서도 그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수근거림입니다.
예수님이 유명한 사람들이나 고위공직자 같은 유력한 사람들을 치유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들의 옹호를 받으면서 편하게 사역을 하셨을 테지요.
하지만, 주님은 가난하고 어려운 사회적 약자들에게 다가가셔서 이적을 보이셨습니다.
이들은 사회적인 목소리와 전파력을 가지지 못하는 계층의 사람들입니다. 소외된 지역의 소외된 작은 자들의 일상에서 일어난 일은 허황된 일로 보이기 쉬웠을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의 개인적 치유의 경험은 사람들 사이에서 헛소문이나 미혹하는 소문으로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요즘처럼 인터넷을 통해 동영상이나 사진을 통해 뉴스가 되는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 소문으로만 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요즘도 마찬가지 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경험하지 않고 소문을 통해 듣기만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많은 소문만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허항된 가공의 인물이나, 아니면 그저 존경할 만한 성인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르니깐요.
그럼 예수님은 이들의 반응이 궁금해서 은밀하게 움직이셨던 걸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은밀하게 보시는 이들은 이런 군중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의혹과 불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인파 중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경험했던 그의 제자들이 침묵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의 이적을 경험했던 자들은 유대인들이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을 죽이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침묵했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의 신앙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 두려움 때문입니다.
아직은 사람과 세상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한복음 12:42~43)
자신이 경험한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보다 세상을 두려워하는 나약한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다면 이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실까요?
예수님과 신앙인들에 대한 불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나아가야 할까요?
그 해답은 친절하게도 다음 절에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14절 -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주님은 우리가 두려움과 무지함에 빠져 영적인 확신과 성장을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해 포기하지 않으시고 가르쳐주시는 분이십니다.
증인되어야 할 순간에 침묵하는 우리의 나약한 모습에서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으시고, 가르치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삶에 희망이 있는 것, 우리가 의인된 삶의 과정을 담대하게 갈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치심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절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도, 주님은 그에게 다시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르치시며 깨닫게 하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아직 예수님의 증인된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계시다면, 이제는 인내함으로 참으시고 가르치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더욱 성장하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힐링교회 김형석 목사 드림.